고민해보고서#4 까라는데 안 깔 용기

관리자
2019-06-05
조회수 2098

까라는데 안 깠더니, 향이 만 배, 안 깐 귤잼

(내 식으로 나아가는 건실한 자아의 힘에 대하여)            


‘까라면 까'라는 말을 직접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? 너무나 익숙해서 귀에 착 붙는 말이지만, 라이브로 이 말을 들었던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. (아니, 내 윗사람이 정색하고 그 말을 해댄다면, 그건 그야말로 정색하고 판단해 볼 일입니다. 법적 조치가 가능한 혹은 그게 필요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.) 그에 반해, 우회적으로 전달되는 ‘까라면 까'는 대체로 다들 들어봤음직합니다. 그 '까라면 까'의 메시지는 은근한 압박이나 집요한 종용으로, 혹은 아예 비굴한 부탁 같은 것으로 전달되기도 합니다. 엎어치든 매치든, 그냥 까라면 까라는 말이면서요. 쳇.



근데, 그럴 때 다들 어쩌셨나요? 비윤리나 비도덕적인 지시까지는 말고, 소소한 업무지시에 대해 순화된 '까라면 까'를 들었던 때를 좀 떠올려 봅시다. 저처럼 그냥 깠던 기억이 주로 떠오른다면, 그 기억이 괜한 굴욕감으로 얼룩지기 전에 밀그램의 복종실험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. 이 실험에서 참가자는 옆방의 학습자가 과제 수행에 실패할 때마다 전기 충격을 주는 역할을 맡았는데, 65%의 참가자가 학습자가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상황에서도 전기 충격을 높이라는 지시에 따랐다고 합니다.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주저했을 가해 행동인데 안그랬던 거죠. 이 복종 실험 결과를 아주 단순화해서, 사람들이 애초에 좀 권위에 복종하기 쉬운 존재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. 그러니 그냥 깠던 기억에 너무 자책하지 마시길. 


그런 보편적인 심리의 경향성 말고도 까랄 때 까게 되는 이유는 아주 많고 다양할 겁니다. 지시를 그냥 따르는 것으로 지켜야 하는 현실의 다른 가치가 있을 수 있고, 쓸데없이 불편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, 어쩌면 책임지는 부담을 덜고 싶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. 심지어 동정이나 호의 같은 마음으로 깔 때도 있습니다.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부장님은 오죽하겠냐 그런 생각, 해 본 적 있지 않나요? 그게 설득할 능력이 없거나 설득할 성의가 없어서 나오는 말일 텐데, 어느 쪽이든 상사로서는 그저 무능한 거니까요. 그의 무능에 혀를 끌끌 차며, 그래 해 주고 말자 하게 되는 그런 거요.  


이렇게 짚어보니, 까랄 때 까게 될 만한 이유가 참 많습니다. 까라는데 안 까기는 여러모로 참 쉽지 않겠어요. 그렇지만, 그렇다고 까랄 때마다 까면, 그러니까 납득되지 않는 지시도 무심히 따르며 살다 보면, 일에 대한, 나아가 삶에 대한 나의 주도성이 너무 옅어지지 않을까요? 까랄 때 안 까서 귤향이 제대로 나는 잼고미네 귤잼처럼, 까랄 때 안 까기도 해야 삶이 좀 내 스탈이지 않을까요?  

결국 문제는 까랄 때 안 깔 수 있는, 자꾸 까게 되는 관성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겠네요. 굳이 말하자면 그 힘은 건실한 자아에서 오는 걸 겁니다. 건실한 자아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알고, 그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, 판단을 행동으로 옮기게 합니다. 그런 자아여야, 까게 되기 쉬운 관성을 거스를 힘이 되고, 그래서 스스로 납득되지 않는 권위의 요구에는 맞설 수 있는 용기가 됩니다. 애쉬의 동조실험으로 보자면(복잡한 실험이지만 후려쳐서 보자면요), 자신의 신념이 불분명할 때 타인이나 조직의 의견에 더 쉽게 동조하게 된다지 않습니까. 그러니 자신의 신념을, 즉 자신의 가치를 분명히 알고 존중하는 건실한 자아가 필요합니다, 까랄 때도 안 까려면요.  


그래서 소소한 '까라면 까'에 그냥 까고 말았던 기억이 좀 있는, 그렇지만 그런 무취의 인생을 살고 싶지만은 않은 우리는 자아의 힘을 기르고자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야겠습니다. 이미 많이들 알고 계십니다만, 자아의 힘은 존중받은 경험으로 자랍니다.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고 응원해주어야 합니다. 그건 까랄 때 까게 된, 자부할 수 없는 경험의 순간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. 그럴 때 괜히 위축돼서 오히려 자아의 힘을 잃지 않도록 일부러라도 잘 챙겨야 할 것도 같습니다. 까랄 때 안 까서 향이 만 배라는 귤잼은 그럴 때 도움이 될까요? 저라면 한 숟갈 크게 떠서 따뜻한 우유에 타 마시면서 다음을 기약해 보겠습니다. 귤잼에 가득한 귤 향처럼 내 인생에 내 향을 마구 발산할 때를 기대하면서요. 


ps. '까라면 까'는 사실 꽤 흉측한 말입니다. 그런데, '까라'라고 해야 그 불합리함이 더 잘 전해질 것 같아서 그냥 써봤습니다. 짜장면을 짜장면이라고 할 때 비로소 짜장면 같은 그런 것처럼요. 거슬리셨던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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